“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시대와 이미지에 대한 거대 담론을 탐구한 끝에서야 발견한 커다란 상자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참신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과 같다.“
-작가 노트 中-

이번 전시에서는 “화가 정영한” 의 회화에 대한 깊은 고찰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얼핏 보았을 때 그의 작품 시리즈들은 컴퓨터로 그리거나 합성한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매우 정교한 붓터치로 여러겹의 레이어를 얇게 펴발라 다양한 스타일의 비주얼을 표현해내는 그의 기법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회화 스타일과 이미지 담론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꼭꼭 씹어서 소화 시키겠다 는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시대정신’ 일 것이다. 동시대의 시각을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일상에서 꾸준히 이미지를 수집한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회화에서 표현되는 대상들은 이미지 그 자체이며 실체가 없는 형태이다. 정영한 작가는 그러한 본질이 ‘신화’ (myth) 와 많이 닮아있다고 말한다. 이는 근작 시리즈들의 제목과 내용에 공통적으로 신화가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신작 시리즈들의 모태가 되는 <아이콘> 연작은 예술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늘날 ‘신화’로 존재하는 작가들의 그림 스타일을 직접 카피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만의 작업 패턴과 틀을 깨는 계기였다고 한다. 또한, 각 작가가 그 작업을 할 때 어떠한 감정적 경험을 하였는지 체험해 봄으로써 단순한 물리적인 오마주와 카피 그 이상의 철학을 담고 있는 시리즈이다.

그렇게 오늘날 정영한 작가의 근작 시리즈인 <시대의 단상> 연작이 탄생하였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브릴로 상자 위에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꿈, 누군가의 즐거움과 같은 특별한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 작가는 회화 시리즈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소중한 것을 선물할 수 있는 물리적인 선물상자, 브릴로박스를 목재로 특수 제작하였다. 이 박스에는 한 세트로 묶인 10호짜리 작품 5점을 보관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며, 5점의 작품에는 각기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담은 이미지들이 그려져 있다.

정영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시대를 넘나드는 깊은 탐구의 결과물로, 현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시하며 보는 이에게 다양한 상상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To me, painting is like discovering a big box filled with fresh messages and images, after exploring grand discourses about eras and images, and taking them out one by one to show."
-From the Artist statement -

This exhibition offers a deep insight into the paintings of artist Chung Young Han. At first glance, his series of works appear as if they were created or synthesized on a computer. His technique of applying multiple thin layers with extremely precise brushstrokes to express various styles of visuals feels as if he is meticulously digesting and processing all the painting styles and image discourses of this world in his own unique way.

The concept that permeates his entire body of work is likely the 'spirit of the times' of the present moment. To capture the contemporary perspective, the artist continuously collects images from daily life. Essentially, the subjects expressed in his paintings are images themselves, not a tangible form. Chung Young Han says this essence is very similar to 'myth.' This is why myths commonly appear in the titles and content of his recent series.

The series, which forms the basis of his latest works, was an opportunity for him to break his own work patterns and frameworks by directly copying the styles of artists who have become 'myths' in art history. Additionally, by experiencing the emotional states each artist might have had while creating their works, the series embodies a philosophy that goes beyond simple physical homage and copying.

Thus, the latest series by Chung Young Han, , was born. On top of the now-mythical Brillo Box, he meticulously piles up personal values, dreams, and unique narratives. The artist goes a step further in his painting series by creating physical gift boxes made of specially crafted wood to present precious items. These boxes are designed to hold five paintings, each adorned with images representing different values.

Chung Young Han's body of work is the result of profound exploration across eras, presenting new possibilities for contemporary painting, and evoking a wide range of imagination and enjoyment in the viewer.



<작가 노트>


소중한 오늘의 단편을 선물하는 브릴로 박스

“작가님의 작품은 어떤 장르의 회화인가요?” 이 말은 평론 인터뷰나 아티스트 토크에서 빠짐없이 내게 던져지는 질문이지만, 몇 번을 준비해가더라도 정답을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전시의 성격에 맞춰서, 또는 구상력 좋은 ‘화가 정영한’에 대해 이미 알려진 쉬운 답변이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퍼즐 조각 같았던 내면의 요구가 점차 전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10년 전부터 나의 작업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동안의 작업을 제3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20년 이상 된 작품들은 제목이 의미하듯 우리 시대의 이미지 담론들에 대한 고민, 젊은 화가의 열정으로 정교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여 올라간 물감층, 그것을 다시 최대한 균일하게 정돈하는 작업 과정, 바다 위에 마치 진공상태에 있는 것처럼 부유하는 오브제들로 구성된 작품들은 쉽게 소비되는 이름 모를 이미지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었으며 그 자체로 메시지였다. 이 작품들에 어느 평론가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말하듯 그런 의미 작용을 연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품들 어디에도 화가 정영한, ‘나의 신화’는 부재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림을 그려오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저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물론 캔버스를 앞에 두고서 말이다. 그렇게 하이얀 캔버스 위에 스쳐 지나가는 불규칙한 선들의 조화, 철저하게 계획된 서사에 뜻밖에 개입된 색채들이 주는 에너지는 흥미롭게도 단편화된 그렇게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개개인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익숙하고도 낯선 충격들에서 ‘예술의 종말 이후’ 또한 그 이후의 예술의 가능성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나의 신화를 소통 도구로 삼게 되었다.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잊고 사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문제 제기,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예술사의 유령들에 대한 오마주, 그리고 이러한 묵직한 메시지들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한 번에 전달될 수 있는 회화 이미지의 힘을 되살려내는 것 등이 바로 개인의 서사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화가로서 내가 그림을 그려야 할 이유이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시대와 이미지에 대한 거대 담론을 탐구한 끝에서야 발견한 커다란 상자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참신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마치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마술 상자처럼, 아니면 특별한 상품을 추첨하는 상자처럼, 또는 설렘 가득한 선물 상자처럼 신화가 된 브릴로 상자 위에 특별한 우리의 서사를 쌓아 올리는 나의 작업은 나의 꿈, 누군가의 즐거움,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삶에 감각적 질문을 던지는 ‘그림’이 될 것이다.

정영한 (화가/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