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과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왜일까. 과일이 주는 신선한 풋풋함, 영롱한 빛깔의 아름다움, 리얼한 생동감, 그것만으로도 과일은 그림의 훌륭한 소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운성의 과일 역시 그러할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한운성의 과일은 분명 여타의 것들과 구분돼야 한다.
그는 정물로서 과일을 그대로 그리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는 사과, 복숭아, 토마토, 고추 등 모든 과일을 작품의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과일 시리즈는 한운성이 1982년 잠시 시도하다 접었던 화두이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간 다른 작업에 몰두했다. 민족적, 근세사적 현실과 상황들을 깊게 추적한 무겁고 심각한 작업들을 그는 그 기간 동안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을 통하여 그는 우리 화단의 의식 있는 주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암울했던 시대상을 구상성과 추상성을 혼합하여 강렬한 인상으로 구현해낸 것이 그 기간 그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다시 과일 쪽으로 작업의 테마를 옮긴다. 격렬한 가슴의 파장들이 연륜과 더불어 숨을 고르며 정제된 화면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과일채집’ 시리즈는 그렇게 시작된다.
미니멀스러운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과일. 어찌 보면 명료하도록 단순한 그 과일이라는 조형 대상이 심심하지 않고 간단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과일 자체로만 놓고 보면, 더 이상 어떻게 잘 그릴 수 없을 만큼 참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조형목적이 아니다.
그는 과일을 통하여 생명을 얘기한다. 다른 화가들의 과일 그림과 다르게 그의 과일은 중심이 되는 꼭지를 정면으로 클로즈업 시킨다. 생명으로서의 과일, 그리고 생명의 중심을 상징하는 꼭지, 그렇게 유추해 보면 우리는 화가 한운성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게 된다.
평론가 장소현은 그의 그림에서 깊은 풍자를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게 단순한 풍자라고 하기엔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 덧붙이자면 냉철한 관조 끝에 여과된 풍자라는 생각이 더 든다. 그렇게 볼 때 ‘과일채집’ 시리즈 역시 심각한 깊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의 과일들이 아름다운 만큼, 세련되고 정제되어 있는 만큼, 그 깊이만큼 생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의 과일에 ‘생’을 접목시켰을 때, 이미 과일은 정물로서의 과일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로서 떠오른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과일은 대상적 재현으로서의 조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원형, 본질, 아름답지만 시니컬한 느낌의 모양, 그렇게 한운성은 단순한 과일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을 들여다 본다. 그렇게 상상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인화된 과일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의 그림이 내포한 의미를 더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홀로 있는 과일, 짝을 이루어 있는 과일, 병렬되어 있는 과일, 그것은 과일의 나열이 아니라 생의 나열이다. 그러기에 장소현의 말대로 은근한 풍자를 느끼게 된다. 물론 그 풍자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과일의 꼭지가 정조준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정명하게 생을 바라다 본다.
그 과일들의 색감이 맑고 밝고 영롱하듯이 그의 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건강하고 신선하다. 그래서 생명과 문명에 대한 그의 시각은 따스하다. 희망적이고 구원적이다.
80년대와 90년대에 이르는 격렬하도록 역동적이었던, 그래서 화면 곳곳에서 감정의 분출을 보였던 작업들의 과정을 거쳐 그는 이 시대와 시대의 모든 삶과 현실을 긍정적으로 껴안는 자신을 ‘과일채집’이라는 화두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