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인
    신화조화

  • Code 1435553573
    작품사이즈 20호(50×72cm)
    재료 Mixed Media on canvas
  • 액자종류
    매트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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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가격 2,0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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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지/ 인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 졸업                        

숙명여대 미술교육대학원 졸업

개인전 6회

KIAF, 홍콩아트페어등 다수 아트페어 참여

9월 일호갤러리 초대개인전

12월 한달간 카페드 유중 개인전

저서<잘 지내나요>  

 

 

 

방송 12년차 아나운서 최지인

mbn정오뉴스만 7년, mbn소중한 나눔 무한행복 MC

2013 매일경제TV아나운서팀장

2014 한국예술방송교육대학 방송진행자과학과장

2007-스무디킹등 SK, 현대아이파크, 웅진코웨이,아이배넷 광고모델

2015 삼성생명 연도대상시상식 진행, 2014대종상영화제 VIP after party MC등 행사 진행

원래는 미술을 전공한 artist최지인

3월 홍콩아트페어, 5월 SOAF

저서<잘 지내나요> 

9월 일호갤러리 초대개인전

12월 한달간 카페드 유중 개인전

 

 

 

최지인 평론글

날고 싶고 거듭나고 싶고 자기를 꽃 피우고 싶은 욕망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다시 시작, 나비 날다, 살다보니, 날개, 날개 단 인형, 그리고 날개를 펴고 싶다. 그동안 최지인이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부친 주제들이다. 그림도 그렇지만 이 주제들에는 사연이 있다. 작가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이 있고, 남들에게 들려주는 고백이 있다. 그래서 자전적이고 서사적이다. 

그 독백이며 고백은 작가 자신에게 한정되지는 않는다.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쉽게 공감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확장할 수가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그동안 생활인으로 지내오면서 잠시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펼쳐든 소회며 다짐이며 자기 자신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그동안 책갈피 속에 고이 간직해두었던 마른 꽃잎을 새삼 펼쳐들듯 지금껏 꿈속에 갇혀 있었던 나비를 현실 속으로 날려 보낸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나비는 그림 속 가상현실 속으로 날아오를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사진전사기법으로 이미지를 전사한 연후에 그 위에 덧그린 그림이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고, 어슴푸레하고 몽롱한 느낌이다. 꿈속으로부터 가상현실 쪽으로 옮아왔다지만, 

정작 미처 꿈을 깨지 못한 듯 몽몽한 느낌이다. 꿈속에서 가상현실 아님 대체현실 쪽으로 이행했다기보다는 또 다른 꿈속으로 갈아 탄 것 같고, 하나의 꿈에서 다른 꿈으로 이행한 것 같다고나 할까. 

전사기법이 바탕에 깔린 것인 만큼 현실 속 실재하는 장소가 차용된 것인데도, 왠지 실재하지 않는 

장소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친근하고 낯 설은 느낌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데자뷰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아마도 작가의 화신이며 분신일 나비가 이런 꿈속이며 비현실적인 느낌을 강화시켜준다. 

그렇게 작가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현실 속으로 나올 수 있었고 날아오를 수가 있었다. 

어쩌면 삶은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인지도 모르고, 꿈속에 또 다른 꿈이 겹겹이 포개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 차원을 떠올리게 하고, 

장자몽이며 호접몽을 떠올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진 현실을 살면서 작가는 사람들이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작가의 분신은 나비로부터 빠져나와 이런저런 인형들에게로 투사된다. 

인형은 인간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대리한다. 인간에게 못할 말도 인형을 통해 대신 말할 수 

있고, 때론 인간에게 못할 짓도 인형을 통해 대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형은 유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여성의 성적 정체성 형성과 관련이 깊지만, 

그 자체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동화적인 판타지를 열어 보이는가 하면, 동시에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 동화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그려낸 것이며, 

악몽은 그렇게 도피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현실원칙이며 현실의 처벌이 그려낸 것이다. 

그렇게 인형에는 야누스처럼 두 얼굴이 하나로 포개져 있다. 

그렇게 포개져 있어서 설핏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잘 보면 보인다. 

인형은 사물이고, 그 얼굴은 그려 넣은 것이다. 그래서 그 표정은 그려준 대로 언제나 웃고 있다. 

마치 피에로처럼 감각적 표면에 드러난 세계의 층위에 속한 얼굴이며 표정이며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어쩌면 그 이면에서 울음을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인형 그림은 마치 어린왕자를 보는 듯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린왕자가 그렇듯 억압적인 현실이며 현실원칙에 대한 부정의식을 숨겨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외양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고 순진해서 오히려 더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형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곰 인형이며 토끼인형, 양 인형이며 목마 

그리고 심지어 로봇마저 날개를 달고 있다.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이며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을 투사한 것인데, 전작에서 마치 꿈의 전령과도 같은 나비의 몽롱한 날갯짓이 좀 더 

분명한 형태를 얻었다고나 할까. 작가의 분신이 나비로부터 인형으로 옮아왔듯, 

날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나비의 날갯짓으로부터 인형의 날개로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 다른 그림에서 아예 비상하는 새를 도입하는 것으로 확장될 터였다.

 

한편으로 인형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작가의 행위는 유년의 추억에 날개를 달아주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 현실원칙에 부닥쳐 욕망이 억압되기 이전의 상태(자크 라캉이라면 상징계 이전의 

상상계라고 했을)로 자기를 돌이키고 싶다는 의지를 반영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현실원칙이 

강한 만큼 은폐되어져있던 도피(아님 승화?)의 욕망을 오히려 더 공공연화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인형들에게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고, 인형들 중 특히 작가의 

분신이랄 수 있는 오뚝이 인형(넘어지면 자동으로 일어서는, 

현실원칙이 강한 만큼 승화의 가능성도 높은)에다 투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새를 소재로서 도입한다. 나비와 날개 단 인형에 연이어진 새는 말할 것도

없이 날고 싶은 욕망을 상징하고, 거듭나고 싶은 승화를 상징한다.